[칼럼] 기후정의를 만난 어느 인권활동가의 이야기 - 9.24 기후정의행진을 향해


1. 2019년 여름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인권운동장 텔레그램방에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사회단체 집담회’가 열린다면서관심있는 인권활동가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글이 올라옵니다. 그때만 해도 저에게 ‘기후위기’는 매우 낯선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집담회라니, 느낌도 그리 좋진 않았죠. 정말 모여서 기후위기 걱정하는 건가싶기도 했구요. 그렇게 시큰둥하게 넘어가려는데, 사랑방 동료가 저에게 한 번 다녀와보라고 합니다. 그해 봄에 사랑방에서 매주 쓰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 주제로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기후환경회의’를 비판하는 글을제가 썼으니 ‘기후 집담회’에 가보라는 거였죠.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랑방에서는 실제로 이렇게 활동이 연결되고 활동담당이 배치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특히 ‘인권으로 읽는 세상’으로 매주 무슨 주제로 글을 쓸지 고민하다보니 평소 활동하던 주제나 영역이 아니어도 자료를 찾아보고 입장과 관점을 벼리기 위한 노력을 강제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 글도 당시 반기문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이 미세먼지 문제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발언을 했는데,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어서 글을 썼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후정의’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기후정의’였네요.

다시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사회단체 집담회’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은 아니어서, 당장 맡고 있는 어떤 일이나 모임이 아니면 구태여 낯선 사람들 모이는 곳에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연이 닿았던걸까요? 낯선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를 홀로 찾아가, 60여 명이 모인 자리에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집담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아마 그날 그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기후정의운동을 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큽니다. 기후위기를 삶의 위기로 느끼는 청소년 기후활동가의 목소리는 어느덧 ‘운동’에 익숙해진 저에게 작은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의 지난 운동 20년을 실패라고 규정하면서, 기후/환경 운동이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왜 실패했는지 돌아보자는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맴돕니다. 사회 전반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절절한 호소들, 이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포부들이 외쳐졌습니다.

2019년 여름,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저에게는 체제전환을 요구하는 담대한 운동과의 만남으로 기억됩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데, 작은 문제 하나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운동의 지향과 가치보다 작은 문제 하나라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힘을 요구하는 풍토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만났던 기후운동은 달랐습니다. 사랑방이 20주년 이후, 곳곳에서 외쳤던 ‘체제변혁’과 대중을 조직하자는 이야기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들으며, 관성적인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변화와 운동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후위기비상행동에 인권운동사랑방은 참여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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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권의 언어로 기후위기를 바라보기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주최하는 이런저런 토론회와 교육에도 참여하고 자료들을 더 찾아보면서 낯선 용어들도 익숙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운동을 투쟁 현장이 아닌 외국 영상자료와 학습을 통해서 접하고 경험하는 것은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거대하고 총체적인 문제로만 다가오는 기후위기를 구체적인 현실로, 이를 겪는 사람의 문제로 해석하고 더 나아가 투쟁하는 주체를 드러내는 언어가 ‘인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기후/환경 운동을 해왔던 이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특정 분야 정책 중심의 운동에서 대중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넘어서야 했던 지점인 것이죠.

한국 기후운동에서도 ‘인권기반 접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고, 인권단체로 비상행동 초기부터 결합했던 사랑방에‘인권’을 매개로 한 활동을 기획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녹색연합, 다산인권센터와 함께 ’기후위기로 인한 인권침해 증언대회’를 열게 됐습니다. 기후위기를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자 기획된 활동이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안정적인 재배가 어려워진 농업의 현실, 폭염 상황에서는 생명의 위협을느끼면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증언자들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저는의문도 커졌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가격폭락 걱정에 웃을 수 없는, 안정적인 수익은 커녕 빚을 내서 연명해야 하는 농민의 현실에 비하면 날씨는 사소한 문제처럼 보였습니다. 건설 노동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일해야 하는 상황을 기후위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폭염 상황에도 노동자를 바깥으로 내모는 일터가 문제 아닌가요? 기후위기를 인권침해로 규정한다는 것은두 가지 방향을 포함합니다.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는 것과 기후위기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더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기후위기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을지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일까요? 저는 조금만 시선을돌리면 우리는 이미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 십년 동안 남반구 국가들이 겪고 있는 기후재난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빈번해진 서구 선진국의 사례들도 많습니다. 과학자 사회의판단은 확고합니다.

문제는 시선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해외 사례 중심이라서가 아닙니다. 한국사회는 농업을 사양산업 취급한 지오래입니다. 매년 400여 명이 건설 현장에서 죽고 있는 건설 노동자는 어떤가요? 홈리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들을끊임없이 타자화하며 자신과 분리하려는 힘이 작동합니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놓인 이들은 이미 불평등의 최전선을살아가고 있는 이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에게 기후위기를 인권침해로 규정한다는 것은 바로 이 최전선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이상 피해를 증언하는 ‘기후취약계층’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기후정의운동’의 주체로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3. 기후정의를 기치로 구체적인 싸움과 전선 만들기

이런 저런 경험과 고민들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2021년 전까지 사랑방이 기후운동에 본격 뛰어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2020년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기후위기 담론은 급속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각종 지면을 통해 ‘체제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필자들도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만 해도 툰베리가 참석한 유엔회의에서 생뚱맞게 미세먼지없는 ‘푸른 하늘의 날’을 제안했던 한국 정부도 국제적 트렌드를 파악한 건지 2020년에는 ‘탄소중립’을 선언하고본격적인 ‘제도화’ 과정을 시작합니다. 약간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개인적 실천과 결합된 문화적 흐름으로‘기후위기’ 담론이 확산되고, 정부와 기업들은 돈을 쏟아부으며 주류화, 제도화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과 2년 전, 집담회에서 느꼈던 ‘체제변화’에 대한 열망과 운동의 꿈틀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한국의 기후운동이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뛰어들어야 상황도 파악되고 운동을 조직할 방향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2021년 기후위기비상행동 집행위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당시 비상행동도 제가 느꼈던 ‘정세변화’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에 ‘기후위기 비상상황 인정하라’는 요구를 했었는데, 순식간에 ‘탄소중립위원회’가 만들어지고‘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이 제정됩니다.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상향하고 이를 법제화하라는 게 운동의 주요한 요구였는데, 정부의 속도가 더 빨랐습니다. 그에 반해 기후운동이 쥐고 있던 구체적인 투쟁 현장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탄소중립위가 ‘2030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와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확정하기 위한 작업에 8월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향후 10년, 30년 동안 한국 사회 기후위기 대응의 기본 줄기를 잡게 되는데, 그 기조가 너무나 분명한 기업과 자본 주도의 녹색성장과 산업육성책이었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기후운동이 이에분명한 반대 전선을 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의기투합한 이들과 함께 ‘탄중위 해체 공대위’를 제안하게 됩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금세 사람들이 모였고 공대위 제안서에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행보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면서도 탈석탄, 탈핵, 탄소중립이라는 수사와 정책방향에 대해 ‘기후정의’의 관점에서 분명한 비판과 요구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던거죠. ‘탄중위 해체 공대위’는 바로 그 지점에서 분명한 입장과 요구, 투쟁을 통해 전선을 쳤습니다. 그렇게 전선을 치고 싸움을 만들자, 사람들이 모이고 운동이 형성되기시작했습니다. 발전노동자, 농민단체, 지역의 투쟁 현장 주체, 크고 작은 인권단체와 기후정의운동 그룹들이 공대위가열어낸 투쟁 현장에서 함께 만나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19 속에서 미신고 집회도 감행하고 서울 노들섬 탄중위 회의 반대 투쟁도 벌여내면서 ‘기후정의버스’를 타고새만금 신공항 예정지와 태안 석탄발전 노동자와 만났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현장이 연결되자 우리가 조직하고 벌여내야 하는 싸움과 요구들이 더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의 차별적 대우,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로 납작해졌던 ‘기후정의’가 기후위기를 불러온 체제전환을 향한 거대한 투쟁의 언어, 대안이 될 수 있다는가능성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4.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에서

3월의 ‘기후정의포럼’을 거쳐 지난 4월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이 출범하게 됐습니다. 기후정의운동을펼쳐나갈 이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작은 장소 하나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대중화된 것 같은 기후위기 이슈도 주류는여전히 녹색성장과 녹색 자본주의적 전망입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러시아의 침략 전쟁이 열어젖힌 에너지위기는 지난 몇 년과는 크게 다른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기후위기 대응이 결코 탈탄소 기술개발의 문제이거나 소비자 차원의 인식전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탄소 배출은 다른 무엇보다 생산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를 둘러싼 결정을 통해 지구 자원의소비와 탄소배출의 대부분은 결정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결정을 사회적으로, 민주적으로 해 본 경험이 전무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로 그 결정은 자본 소유자들만의 독점적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이윤축적을 목표로한 ‘생산 결정’을 내립니다.

이윤이 아닌 필요에 기반한 경제로의 전환, 자본 성장이 아닌 삶의 성장, 착취와 배제가 아닌 돌봄과 연대의 경제, 자원추출과 폐기가 아닌 재생과 순환의 경제를 구축할 때 탈탄소 사회도 가능합니다. 이는 생산에 대한 권리를 독점하는 자본주의 권력관계에 도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획입니다. 이는 프로그램이나 정책의 차원이 아닌 권력의 문제입니다. 권리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이는 권력과 정의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권의 관점에서 기후위기를 직면한다는 것은 바로 불의와 억압에 맞선 정의의 문제로 기후위기를 다루고 넘어서는일입니다. 바로 ‘기후정의운동’이 표방하고 걸어온 길입니다.

오는 9월 전국 곳곳에서 ‘기후정의’를 기치로 수 만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9.24 기후정의행진’입니다. 새만금에 공항 반대 투쟁처럼, 전국 곳곳에서 기후부정의에 맞선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내세우며 진행되는 산업전환으로 고용위기에 처한 노동자들도 모여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재생에너지에 밀려 삶터와 농토를 잃는 농민들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거대 자본의 눈치만 보면서 위기를 현실로 만들고 있는 정부에분노하는 수많은 시민들도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9월 24일 서울에서 우리 모두 함께 모여, 어떤 기후부정의가 자행되고 있는지 폭로하고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서로 확인합시다!

필자 : 정록(인권운동사랑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