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신임 '내용'을 묻자 !
- 반민중적 정책 바꿀 의지 있는지 확실히 해야


'재신임'을 둘러싼 논란이 거대하고 압도적인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다. 이해타산을 좇아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정치권을 한편으로, 그리고 지난 10여년 동안 기나긴 정치적 냉소와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을 다른 한편으로 날카로운 쟁점들이 대립하고 있다.

정치 청사진 없는 면피용

재신임 카드가 불리한 정국의 구도를 반노무현 대 친노무현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는 어느 쪽이든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전북시민운동연합 최 두현 정책실장은 "자신을 당선시킨 시대적 열망과는 거의 반대로 행동하면서 지지자들까지 다 버린 노대통령이 무엇으로 신임 여부를 받겠다는 것인지 답답하다"며 정부는 먼저 "다수당보다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주완주연합 박 기수 집행위원장은 "(재신임 선언은) 대통령이 농민의 절망적인 상황을 외면하고 한·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조속 처리를 국회에 요청한 것에서 보듯이, 민중생활과 관련 없는 자기입지 강화용"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13일 논평에서 노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 FTA 비준, 핵폐기장 설치 문제 등 국정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며 "국민을 볼모로 한" 재신임 선언에 반대했다.
전북민중연대회의 전 준형 집행위원장은 "노 대통령의 대미 저자세와 정치·경제개혁 실패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을 실행해온 결과라고 봐야 한다"면서 "재신임이 의미있으려면 '미워도 다시 한 번'을 구걸하는 그가 과연 지금까지의 정책을 바꿀 의지가 있는지 확실하게 묻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시민사회단체를 포함한 진보진영은 국민들에게 어떤 판단 기준도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재신임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최 두현씨는 '재신임이냐 불신임이냐'를 선택하는 일이 "백지로 제출된 답안지에 점수를 매기는" 우스꽝스러운 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재신임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전 준형씨는 민중진영이 "단순히 재신임 또는 불신임을 선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오히려 이라크 파병 반대, 근본적 정치개혁 등을 이참에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양자택일 시험지 버려야

전북대학교 이 중호 교수(정치학)는 "참여민주주의는 결코 대통령의 구호나 단체장을 비롯한 정치권의 자성에 기대할 수 없고, 시민의 자치의식과 자발적인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며 "정치권의 개혁 수준은 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재신임 선언이 이라크 파병 추진과 관련된다는 지적도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사회당 전주완산지구당 설 정은 위원장은 "(파병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겠다고 한) 대통령의 13일 국회 시정연설은 '재신임 뒤 파병'을 암시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대학원 철학과에 재학중(박사과정)인 최 원씨는 13일 '왜 12월 15일인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원래 1월, 2월을 찾다가 점점 일정을 앞당겨 12월 15일로 못박은 것은 …△ 미국의 파병 압박을 '연내 결정'으로 진정시켜왔던 점 △ 12월에 다시 6자회담 일정이 잡혀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라며 "재신임이 통과되고 나면 곧바로 이라크 전에 대한 파병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라크 파병 문제를 재신임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반드시 확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문만식·임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