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내용는 ‘통일뉴스’에 연재된 기사 중 일부입니다.
한미 FTA와 관련한 한국사회 정세와 정치관계적 배경을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듯 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의견도 수렴하고 있습니다.
한미 FTA에 대한 여러분의 다각적인 견해와 인식이 교류되는 기획연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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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한미 FTA를 어떻게 볼 것인가
참여정부 개혁적 지식인들의 행보, 정태인씨의 경우
한미 FTA와 관련하여 청와대 전 비서관 정태인씨의 행보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정태인씨와 관련한 이러저러한 보도와 논란 중에서 지엽말단적인 문제는 빼고 이후 한국 사회의 진로와 관련하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정태인씨와 관련한 글은 프레시안, 레디앙, ‘한겨레 21’ 4.25자를 주로 참고했음)
시기적 측면에서
첫째는 시점이다.
정태인씨에 따르면 당초 FTA를 추진하는 일차적 대상은 일본이었다가 9월 대통령의 코스타리카 방문 이후 급진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05년 10월에서 2006년 1월에 이르는 시기 미국이 요구했던 4가지 조건(05년 10월 의약품 가격정책, 05년 11월 자동차 배기가스 문제, 2006년 1월 쇠고기 수입과 스크린쿼터)을 수용하고 2.3 미국에서 한미 FTA 추진을 전격 선언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정세는 다음의 세가지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03년 2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부터 04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까지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난항을 빚는 가운데 동상이몽의 6자회담이 실속 없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미국은 이라크 상황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북을 정도 이상으로 자극하기 어려웠고 북은 한편으로는 핵 억제력을 강화하면서 원론적인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하였다. 6자회담이 거듭될수록 중국의 입지가 커진 반면 노무현 정부는 북핵 해결을 위해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편 등에서 양보하는 대신 미국의 대북 공세를 일정한 수준에서 제어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둘째 시기는 2004년 11월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재선한 뒤 북의 대미 공세가 시작되고 (2.10 핵 보유선언)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단계이다.
9.19 공동성명은 북핵 폐기를 고리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 북미/북일 수교, 포괄적인 경제지원과 협력 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시기는 9.19 공동성명 이후 미일의 강경파가 9.19를 부정하는 대북 공세를 시작하는 한편 역으로 북중 관계가 심화되는 단계이다.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면 한미 FTA가 추진되는 시기는 9.19 공동성명 이후 미일 강경파의 대북 공세가 시작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세력관계의 측면에서
둘째는 세력관계이다.
정태인씨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외교통상부의 관료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노무현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둘러 싼 세력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이해영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최근 특히 90년대 이후의 변화는 분명 새로운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절대적 친미’로부터 ‘상대적 친미’로의 진화는 지배블록 내지 지배엘리트 내 전통적 친미파 혹은 ‘한미동맹파’의 지위변경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이는 나아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재편과 적응을 강제하는 조건이었다. 특히 김대중 정권 -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정세전개는 한미동맹파의 게토화까지 요구되는 위기징후였음에 분명하다.
부시정부내 네오콘의 시각으로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미공조의 균열은 한미동맹 구조 자체의 와해로 과대 선전될만한 사안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내 정치경제적 조건에서 포괄적 정치경제적 협정으로서 한미FTA는 위축된 한미동맹파의 지위를 복원하는 매우 유리한 환경이 되고, 또 미국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미국/재벌/관료 복합체의 재공고화를 기획함에 가장 바람직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FTA는 한국사회내 지배블록내 한미동맹파의 총반격의 성격을 가질 수 있음에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한미FTA, 전략적유연성, PSI 등의 아젠다와 남북관계상의 모종의 프로젝트를 두고 한미간 빅딜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미국과 한국사회 신주류와의 대타협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정리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상대적 친미파가 집권하면서 한미공조의 균열이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부시정부내의 강경파와 절대적인 친미파의 총반격이 한미 FTA로 외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변화는 한국사회 신주류 세력의 친미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력 관계의 변화는 미국의 주요 인사와 연구기관의 발언과 보고에서도 확인된다.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한국은 북한과의 화해 및 한반도 긴장 완화와 중국과의 좋은 관계 유지를 최우선 관계로 두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한국 태도를 바꿀) 가장 강력한 동인은 한국과 중국·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거나 “또 새로운 한국의 지도력이 북한을 다른 시각에서 볼 경우, 한국이 미사일방어 계획 참여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내다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화해 협력파 대신 한나라당류의 보수우파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것을 기대하는 위와 같은 시각은 최근 미국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다.
아마도 미국은 노무현 정부의 친미화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선에서는 절대적인(?) 친미세력을 선호할 것이고 이는 노무현 정부가 그나마 견지하고 있는 마지막 선인 남북관계 유지, 개선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노무현 정부의 급격한 친미화에 대한 저항이 각계각층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수준의 상대적인 친미세력까지를 전복하려는 미국의 개입이 노골화되면 정국은 심각한 대결국면으로 치달을 것이다.
동북아 질서의 방향이라는 측면에서
셋째는 동북아질서에 대한 방향이다.
정태인씨는 “세계화는 불가역적인 흐름”으로 “다만, 어떤 세계화냐가 문제”인 데 가장 좋은 방식은 “지역 내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방식의 FTA가 먼저 추진되고, 역내 경제통합이 강화된 뒤 역외와 FTA를 강화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아세안, 한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을 잇는 중간지대를 만들고 중국과 미국이 경쟁하게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정태인씨는 “동북아시대위원회(동북아위) 비서관 시절”, “김현종 본부장을 수시로 만났고” 이 과정에서 “김현종 본부장이 한국-싱가포르 FTA에 최초로 '개성공단의 한국 원산지 인정' 항목을 반영하고 러시아와의 포괄적 경제협력협정(CEPA,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을 추진한 것도 동북아위의 건의에 의해서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위 정태인씨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첫째, 세계화의 견지에서 동북아시아경제를 통합하는 것은 대세이고 둘째, 그 방향은 한국이 중심을 잡고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며 셋째, 남북경제협력과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동북아 균형자론, 동북아시아 강조 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탈미적 색채가 있는 상식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주장이다.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냈던 서동만씨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사실 출범 당시 노무현 정부는 DJ정부 이래 아세안+3(한ㆍ중ㆍ일)의 틀을 살리면서 한ㆍ일, 한ㆍ중 관계에서 FTA로 간다고 하는 구상이었다. 이것이 한ㆍ아세안, 한일FTA를 통해 지역협력의 기반을 다지고 한중과 한미FTA 간에 경쟁을 시킨다는 구상으로 부분 수정된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2005년 9월부터 진행되었던 사태 발전은 한미 FTA의 전면화 그것도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공격적인 성격(전략적 유연성과 경제동맹)의 정책으로 급선회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급격한 우선회에 대한 예민한 반응은 미국과 북중 모두에서 확인된다.
먼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6년 2월 2일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협상이 시작되었음을 공식발표한 때에 맞춰 내놓은 대통령 성명에서 “남(한국)과 맺는 자유무역협정은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이익을 두 나라에 안겨줄 것인데, 그 협정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engagement)에 의거하여 추진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부시 대통령 또한 한미FTA를 경제적 문제로 보지 않고 정치적, 전략적 문제로 보고 있으며 게다가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의거하여 추진”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을 아시아에 대한 개입 특히 중국을 요리(?)하는 거점으로 삼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2005년 9.19 이후 나타나고 있는 북중관계의 심화는 이에 대한 역반응이다. 2005년 10월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 2006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은 이를 잘 보여주는 데 9.19 성명이 온전히 보장된다고 북중이 판단했다면 <북핵과 평화>의 교환, 북미/북일 수교가 예정되어 있는 조건에서 북중 관계를 급진전시킬 필요성은 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정태인씨의 태도는 중도적인(?) 입장을 가지고 출발했던 노무현 정부가 급격히 친미화하는 것에 대한 개혁적인 지식인의 반발이다. 비슷한 맥락에 있는 사건이 NSC 문건 유출 사건,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냈던 서동만씨의 견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논하고 있는 최장집 교수 등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2002년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세력이 대미관과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두고 양분되고 있는 현상의 일단이고, 한미 FTA는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 만큼 한국사회는 중간 지점을 허락하지 않는 예민한 대치 국면으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