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차별금지법이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에 언급하는 사건이 있다. 몇 년 전 개인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의 일이다. 한 대도시의 공원에 있던 푸드트럭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내게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 오더니 한국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변한 나를 응시하던 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장황한 말을 꺼냈다. 일본어를 거의 모르는 내가 얘기를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아챘는지 그는 마지막엔 영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그 말에 당황하던 내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던 상황에서 푸드트럭의 사장님은 단호한 말투로 노인을 물러서게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게 그녀는 주문했던 음료를 건네며 영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본에 온 것을 환영해요.” 당장 나가라는 말에 발밑이 얼어붙는 듯했던 마음이 조금은 포근하게 변했다. 한국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비장애·이성애·남성의 삶을 사는 내게 있어 존재를 거부당하는 차별이 어떤 감각인지를 일깨워주며, 동시에 개인의 차이에 무관한 차별 없는 환대가 무엇인지를 잠시나마 뚜렷하게 경험했다.
차별의 구조에서 나오는 힘은 여행을 가서 잠시 마주친 기분 나쁨으로 끝나지 않는다. 약 1년 전 세상을 떠난 故 변희수 하사를 비롯한 동료시민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과 일상이 차별과 혐오로만 짜여 있다면 누군가는 끊임없이 벼랑으로 밀려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한 오늘의 문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되면 ‘종교행사에서 성소수자 반대 설교만 해도 처벌 받는다’, ‘자유를 억누르는 독재사회로 만들고 혼란해진다’는 허위사실을 근거로 소위 ‘나쁜’ 차별금지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앞서 밝혔던 필자의 경험처럼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 차별 없는 사회가 필요하며, 평등한 삶을 위해 차별과 혐오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타인에 대한 혐오를 행하겠다는 자유는 그것을 가장한 폭력일 뿐이다. 또한 차별의 문제는 하나의 사안, 하나의 정체성만을 특정하여 발생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만이 아닌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며, 차별금지사유를 찬반의 장에 올리는 것이 우리 사회 누군가의 존재를 삭제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년 한해 다방면의 시민들의 운동과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여론은 대세가 됐다. 여론조사를 하면 대선을 앞둔 어느 후보보다 높은 70~80%의 지지를 얻고 있는 법안이 차별금지법이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에 차별금지법 제정 의견을 보내고 있다. 유엔인권사무소는 지난해 12월 ‘국제인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다양한 사유를 망라하는 강력하고 포괄적인 평등법(차별금지법) 제정’을 한국 국회에 촉구했다. 유엔인권사무소는 ‘지난 14년간 국회는 법 제정을 위한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해왔다’며 ‘포괄적 평등법안의 채택은 시급하며 이미 오래전에 그 기한을 넘겼다.’고 꼬집어 얘기했다. 유엔인권사무소와 비슷한 시기에 휴먼라이츠워치, 국제앰네스티 등 30개 국제인권단체도 ‘한국 국회에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즉각적인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 서한’을 발표했다.
시민들부터 국제사회까지 연내제정을 요구하며 법제화의 결단을 촉구해왔으며 지금은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이 수도권 곳곳을 누비며 외치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민심을 듣는 기관이 되어야하는 국회는 국민동의청원 및 발의된 4개의 차별금지·평등법안의 상임위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은 2021년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대선보다 먼저다. 차별금지법이 있는 나라를 만드는데 더 이상의 기다림은 필요하지 않다.
※ 이 글은 <전라일보>의 전라포럼 섹션에 2021.1.20 실린 칼럼을 수정하였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