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선(전북평화와인권연대 자원활동가)-
"집이 가까운가? 멀어서 곤란하다면 나가서 치마 사 입고 화장도 좀 하지."
"왜 그러시죠? 전 집에서 가장 좋은 옷 입고 나왔는데요."
난 정말 억울했다. 좀 걸리는 게 있었다면 밤에 눈이 와 흙탕물이 튄 검정구두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런 복장으론 곤란하니 갈아입고 오던지, 일을 그만 두라'는 그 말이 얄밉기도 했지만 찬찬히 나를 뜯어보는 눈이 무서웠다. 나는 11월 18일부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전시회에서 안내와 진행을 맡아 2주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전시회장 한켠 어수선한 방에 들어가 사전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던 아르바이트생들 중 남자들이 몇몇씩 짝을 지어 일하러 나가고 다른 여자 한 분과 둘이 남았다.
세련된 모습으로 민주화과정을 표현한다...
앞에 앉아 일을 분배하고 지시하던 관리담당자는 "전달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으니 깨끗한 복장으로 갈아입든지 그만 두든지 알아서들 하라"며 매우 불편하다는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깨끗하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는 광복 이후 과거 50년간 이어져 온 민주화의 과정을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진행요원은 직접적으로 관람객과 만나기에 호감을 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쳇, 그럼 내가 혐오감을 주며 민주화의 뜻도 모르고 단정치 못한 채로 손님을 맞는 것이 불순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볼화장과 치마는 무슨 근거에서 깨끗하고 단정하다는 것인지?'
교육한다고 하길래 관람객에게 설명할 것을 배우고 주의사항을 알아두라는 것인 줄 알고 수첩과 질문꺼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꼴이란 취업면접자리에서 결혼계획이 있냐고 묻는 면접관의 질문에 당황하는 취업여성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민주화의 뜻을 훼손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전시회의 꽃이 되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자 뒤늦게 들어와 앉아 있던 다른 행사 담당자는 '전시회의 꽃이라니 그런 말을 들으니 자신이 더욱 불쾌하다'며 나에게 화를 냈다. 아니 화를 낼 사람은 나인데 지가 더 화난다니.
난 집에서 가장 좋은 바지, 제일 좋아하는 검정색 니트에 언니에게 빌려 입은 검은 상의가 무색해진 그 자리에서 그걸로는 어림없다는 표정을 견뎌야 했다. 그 얼굴을 확 긁어 주고 싶은 걸 참았다.
하여튼 나는 안되는 거였고 관리담당자로서는 애초부터 나와 일할 생각이 없었으니 다른 일은 시키지도 않았다.
지금도 진행요원으로서 깨끗하고 단정하며 호감 주는 복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럼 과연 관람객의 복장은 그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혹여 누군가 가벼운 점퍼에 청바지차림으로 민주화운동사료전시회를 찾는다면 난 충고해 주고 싶다.
'그 곳이 어떤 곳인데 그런 옷을 입고 가십니까? 그곳은 민주화운동을 정리하고 그 뜻을 되짚는 자리인데 가신 님들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저 단정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당신 불순한 것 아닙니까.'
사실 나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그 곳에 간 것이 아니었다. 돈을 벌러 간 것이다. 만약 내 자리가 아닌 곳에 간 것이 잘못이라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서 민주화기념사업회의 진실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
내 자리가 아-니네-?
그러나 나는 그 전시회가 다른 전시회와 다를 바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과연 누굴 위한 전시회인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민주'가 '상품'이 되어 버린 시간, '민주화'가 '박제화'가 되어 버린 장소에서 터덕터덕거리며 나오는 길에 관리담당자가 한심하다는 듯 전시회 화보와 엽서를 쥐어 주며 한마디 한다.
"그 뜻을 잘 되새기십시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나 대신 해주니 정말 기가 막혔다.
주간신문 [평화와 인권] 318호